'메달이 만병통치약?' 성적지상주의의 그늘 [ST연중기획-한국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②]

입력2020년 09월 27일(일) 20:13 최종수정2020년 09월 28일(월) 16:09
사진=픽사베이
스포츠투데이는 연중기획으로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격주로 연재한다.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는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 속에 가려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편집자주》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이정철 기자] 1920년 조선체육회 창설 이후 지난 100년간 스포츠는 우리 민족과 함께 했다. 1936년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나라 없는 설움을 겪던 우리 민족이 잊고 있던 자긍심을 깨웠다. 1947년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금메달과 1948년 김성집의 런던 올림픽 남자 역도 미들급 동메달은 광복된 조국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한국 체육은 대한민국과 함께해 왔다. '박치기왕' 김일, '짱구' 장정구, '4전5기' 홍수환의 승리를 보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나라를 위해, 집안을 위해 서독에서 일했던 광부와 간호사들은 '갈색폭격기' 차범근의 활약을 보며 조국을 떠올렸다.

군부 독재 종식 후 성공리에 개최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국가임을 입증하는 무대였다. IMF를 극복하고 맞이한 2002 한일 월드컵은 한국의 저력을 보여줬으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세계 평화 기여라는 올림픽의 근본 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이 한국 체육의 발전이었고, 한국 체육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은 현재 깊은 어둠에 빠져 있다.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에 가려졌던 어두운 부분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고(故) 최숙현 선수의 안타까운 죽음은 한국 체육계가 더 이상 어두운 면을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줬다.

스포츠투데이는 연간 기획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통해 지난 100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과 그 원인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위해 우리 체육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002 한일월드컵 한국-이탈리아전 / 사진=Gettyimages 제공

▲ 국위선양을 위한 엘리트 체육, 성적지상주의를 불러오다
한국에서 스포츠는 국민위안과 국위선양을 위한 도구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와 6.25 전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국민들은 스포츠를 보며 위로를 찾았다. 군부 정권은 스포츠를 국민들의 시선을 뺏을 수 있는 도구이자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 무대에서의 성과가 필요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빨리 빨리'는 스포츠에도 적용됐다.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엘리트 체육을 중심으로 한 투자가 효과적이었다.

엘리트 체육을 방향으로 잡은 투자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따낸 양정모의 금메달이 그 신호탄이었다. 한국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로 종합 10위에 오르며 처음 종합 순위 10위권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의 성과는 더욱 눈부셨다. 12개의 금메달, 10개의 은메달, 11개의 동메달을 따내 종합 4위를 차지하며 전 세계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어느새 한국은 하계, 동계 올림픽과 월드컵을 모두 성공 개최한 국가가 됐으며, 올림픽 때마다 종합순위 10위 안에 자리하는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엘리트 체육 위주의 빠른 성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작용을 불러왔다. 내실을 소홀히하고 성과와 성적만 우선하다보니, 그 과정에서 결여되고 부족한 부분이 생겼다. 뿌리는 빈약한데 풍족한 결실을 바라는 상황이 됐다. 어느새 괴물이 된 성적지상주의는 체육계를 좀먹기 시작했다. 모든 가치가 성적으로만 매겨지는 풍토에서 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은 매몰되고 말았다.

사진=Gettyimages 제공

▲ 획일화된 입시 구조, 결국은 성적이 좌우
엘리트 체육으로 인한 성적지상주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학교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대학교에서 프로 또는 실업 무대로 가는 과정이 성적 중심으로 획일화되면서 부작용을 낳았다.

물론 성적과 입상, 메달은 입시 과정에 있어 공평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유용한 수단이다. 다만 입시, 입단 과정에서 성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절대적이고, 그 과정에서 지나친 경쟁이 벌어지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학생선수들이다. 선수이기 전에 학생이어야 할 초중고교생들이 학생이기 전에 선수가 되는 본말전도 현상이 나타났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운동부 선수가 되면 보통 오전 수업만 받고 오후에 운동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학교에서 경험해야 할 사회화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 수업을 듣기도, 친구들과의 교류도 어려워진다.

이는 결국 학생들의 선택지를 빼앗는 결과로 나타난다. 한 번 체육 진로를 희망했던 학생이 다시 학업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선택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학생선수들에게 남은 길은 체육에 올인하는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경쟁이 심화되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발생한다. 사회화가 학교가 아닌 운동부에서 이뤄지다보니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부분들이 결여된다. 그 안에서 지도자, 선배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강화되며, 개인의 개성은 사라진다.

허정훈 중앙대 교수(체육시민 공동연대대표)는 스포츠투데이에 "학생들의 직업은 학생이 아닌 선수였다. (학생선수들은) 보통의 국민들로 살아갈 지식과 상식을 배우는 시기를 버려야 했고, 이는 학습권 침해로 나타난다"면서 "선수들은 메달과 성적을 위해 폭력, 성폭력, 가혹행위, 인권침해도 참아야 하고 숨겨야 했다"고 학교 체육의 현실을 설명했다.

이어 "부모들은 이를 알면서도 눈감아야 했다. 메달과 성적, 선수 기용에 지도자의 절대권력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눈치 보기에 노심초사해야 했다. 이것이 메달과 성적이 있어야 하고 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구조와 환경에 갇힌 선수와 학부모들의 피해"라고 지적했다. 선택지가 없는 현실에 처한 선수들은 더욱 성적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집착이 '성적이 곧 최고'라는 성적지상주의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사진=Gettyimages 제공

▲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 한국 체육계는 부응할 수 있는가?
심석희의 용기 있는 고백, 고(故) 최숙현의 억울한 죽음 등 체육계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성적지상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권위적인 지도자, 수직적인 선후배 관계, 체육계 (성)폭력, 학부모 금전 요구 등 다양한 체육계 병폐의 근본 원인을 살펴보면 결국은 성적지상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성적을 내야 하니 악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 돼버렸고, 이를 이겨내는 이들은 엘리트 체육의 수혜자, 버티지 못하는 이들은 낙오자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한국 체육계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 체육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으며, 학생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수업을 듣게 하는 등 부작용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대한체육회 등 대응에 나서는 주체들이 어떻게 보면 엘리트 체육과 성적지상주의의 수혜자또는 승리자인 상황에서 기존의 질서를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 체육의 새로운 100년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달라질 때가 됐다.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이정철 기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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