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명이 걸어 온 길 [인터뷰]

입력2020년 10월 27일(화) 10:36 최종수정2020년 10월 27일(화) 10:36
유재명 / 사진=에이스팩토리 제공
[스포츠투데이 우다빈 기자] 지금의 배우 유재명이 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연습장, 극장을 우직하게 오간 끝에 맞이한 전성기다. 수년간 여러 히트작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유재명에게 연기는 '하룻밤의 꿈' 같다.

15일 개봉한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제작 루이스픽쳐스)는 6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웰메이드 범죄극의 강점을 자랑하며 좌석판매율 1위를 차지하는 등 기록을 경신했다. 실관람객들의 뜨거운 입소문 속에는 유재명, 유아인의 뚜렷한 존재감이 있었다.

'소리도 없이'는 납치한 아이를 맡기고 죽어버린 의뢰인으로 인해 계획에도 없던 유괴범이 된 두 남자의 위태로운 범죄 생활을 그린 영화다. 유재명은 극 중 범죄 조직의 신실한 청소부 창복 역으로 분했다. 작품이 개봉하기 전부터 유재명은 '소리도 없이'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내게 이런 작품이 왔다는 게 행복했다. 단연코 가장 행복감을 준 작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개봉한 소감으로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나 싶다. 도시 속 안 좋은 감정들이 빨리 사라지길 바란다. 우리 영화는 봄날의 낮술 같은 영화다. 자유롭다. 취해도 기분이 안 나쁜 낮술 같은 영화기에 많이 봐주셨으면 한다"고 소개했다.

유재명은 매 순간 자신에게 오는 작품을 가장 사랑하는 배우다. 유재명의 오래된 습관은 제안 받은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읽으며 장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소리도 없이' 시나리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사실 많이 충격을 받았다. 무겁기도 하면서 기묘하다. 운명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가 놀라웠다. (완성된 영화는) 너무 밝고 유머러스하다. 색감도 너무 예쁘다. 무겁지만 감각적으로 잘 다뤄져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극 중 범죄 조직의 신실한 청소부 창복은 태인(유아인)과 한 쌍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한쪽 다리를 저는 창복과 말을 하지 않는 태인의 기묘한 모습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신뢰를 베이스로 한 직장 선후배 같다. 유재명은 인물에 대해 "태인보다 어른이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친근한 이미지를 완성했다. 일을 하는 동안 태인과 싸우기도 하면서 귀엽게 표현하고 싶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무서운 사람 같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소시민 같은 인물"이라 설명했다.

"연극을 오래 한 만큼 그동안 다양한 연기 작업을 했다. 몸의 컨트롤에 대해서는 노하우가 있다. 다리를 저는 연기가 불편하진 않았다. 신체적인 결함은 극 중 약자들의 선택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장애가 불편하게 보일까 조심스러웠다."

작품 속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태인과 달리 창복은 유난히 말이 많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장면에서 대부분의 소리는 모두 창복의 잔소리다. 유독 길고 많은 대사가 힘들진 않았을까. 이에 유재명은 "대사가 많으면 (당연히) 힘들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고 막 하는 말들이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단란하게 보여졌다. 평소 애드리브를 선호하진 않지만 감독님의 허락 하에 애드리브를 넣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는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다. 인물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기묘하고 낯선 인물이기에 고민은 짙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한 씬 한 씬마다 촬영을 마칠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다는 유재명이다. 만족감 보다는 그저 작품을 잘 해냈다는 안도감이 남았다.
유재명 유아인 소리도 없이 / 사진=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유재명은 낯설고 새로운 장르를 표방하는 '소리도 없이'가 관객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길 원했다고. 그는 "어렵고 새로운 영화다. 작품이 무겁기만 하거나 진지하다면 같이 관객과 가지 못 한다. 사건의 전개뿐만 아니라 약간의 유머러스, 편안함, 친근함 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이야기의 가장 주 포인트가 된 창복과 태인의 관계. 극 중 뚜렷한 전사가 드러나지 않지만 두 사람 간 감정은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이를 두고 유재명은 "창복에게 태인은 없어선 안 되는 존재다. 또 태인은 창복이라는 어른이 없으면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동반자 같은 사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간다"고 말했다. 이처럼 두 인물의 교감은 유재명과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있기에 완성됐다. 유재명은 후배인 유아인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는 잘생겨서 놀랐다. 촬영 하는 날 살을 엄청 찌워 왔더라. 자연스럽게 촬영에 들어가며 실제 우리 모습처럼 편안하게 작품에 녹아들었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관계로 만나고 싶다. 선악의 대립도 좋고 버디 무비도 좋고 뭐든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유아인은 개인적으로 표정이 참 풍부하다. 말이 없는 역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겠더라. 어그적 어그적 걷는 게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도 너무 자연스럽게 체화한 게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범죄의 영역에 있지만 태인에게 창복은 좋은 어른이자 선배다. 실제 유재명은 어떤 어른일까. 이를 두고 유재명은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술 마시다가도 잔소리를 한다. 쓴 말을 안 한다고 해서 좋은 선배가 되는 것은 아니고 말을 많이 해서 나쁜 선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때와 장소를 잘 가린다. 내가 생각했을 때 좋은 선배이자 어른은 나이를 먹으며 늘 또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친구 같은 모습이다. 사실 후배들 중에서도 못된 놈 많다. 툭하면 잘 모르겠다더라. 마음을 안 연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재명 유아인 소리도 없이 / 사진=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유재명은 1997년 연극 '서툰 사람들' 이후 2001년 영화 '흑수선'으로 충무로에 입성했다. 최근 '비밀의 숲' '이태원클라쓰' '나를 찾아줘' 등 욕망이 가득한 이미지를 선보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친근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이에 유재명은 "전략적인 행보를 보이는 배우처럼 보이지만 내겐 매 시나리오가 최고 같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작품을 하게 된다. 또 제가 잘생긴 얼굴도 아니니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얼굴"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또 대표작 '응답하라 1988' 이후 작품의 중추 같은 역할을 여럿 맡기도 했다. 여러 작품을 거쳐오며 캐릭터의 압박감, 비중에 대한 부담감도 자연스럽게 생겼다. 이 과정에서 과거 맡은 역할만 집중했다면 지금은 동료들과 함께 굵은 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는 유재명이다.

"스무 살 때 연극을 만나 20년 동안 연기 매력에 빠져 살았다. 그동안 내게 목표가 있거나 어떤 배우가 되어야지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하루 밤의 꿈처럼 작품을 만들고 허물고 하다 보니 배우 유재명이 됐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지금 이 작업이 제 마지막이 될 수 있다."

[스포츠투데이 우다빈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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