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주먹에서?" 군대 고참보다 무서운 체육계 선배 [ST연중기획-한국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④]

입력2020년 11월 02일(월) 12:56 최종수정2020년 11월 02일(월) 15:36
사진=픽사베이 제공
스포츠투데이는 연중기획으로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를 격주로 연재한다. '한국 체육, 새로운 100년을 위해'는 지난 100년간 화려한 성공 속에 가려진 한국 체육의 어두운 현실을 살펴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한국 체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편집자주》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프로야구 NC 다이노스는 지난 8월 2021년 신인 1차 지명 선수로 지역 유망주로 꼽히던 A선수를 지명했다. 고교 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A선수는 프로에서 실력을 가다듬을 경우, 미래에 뛰어난 활약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NC 구단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A선수가 과거 후배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피해자 측의 폭로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구단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팬들의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NC는 불과 3일 만에 A선수의 1차 지명을 철회했고,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1차 지명 선수를 선발하지 못한 팀이 됐다.

프로 무대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A선수는 NC의 1차 지명 취소로 갈 곳 없는 상황이 됐다. 한 달 뒤 열린 2021년 KBO 리그 2차 신인드래프트에서도 A선수의 이름을 호명하는 팀은 없었다.
고 최숙현에게 폭력 및 가혹행위를 한 선배 선수 / 사진=DB

▲ 직접 폭력 피해자의 37.9%, 선배한테 맞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가 알고보니 후배에게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프로야구 팬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선후배간 폭력은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지난 10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초·중·고 학생 선수 인권상황 전수 특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학생 선수 5만7557명 중 14.7%인 8440명이 신체 폭력을, 6.7%인 3829명이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인권위는 "학생선수 폭력·성폭력 문제는 지도자-선수 관계뿐만 아니라 선후배선수에서도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선수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선후배간의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2020년 실업팀 선수 인권침해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직접 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선수 가운데, 37.9%가 가해자로 선배를 지목했다. 특히 여성 선수들이 선배로부터 더 많은 폭력과 괴롭힘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올해만 해도 체육계 선후배간 폭력 사건이 여러 차례 수면 위로 떠올라 논란이 됐다. 지난 6월 스스로 세상을 등진 트라이애슬론 선수 고(故) 최숙현은 전 소속팀 선배 선수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에 시달렸다. 가해자로 지목된 선배 선수들은 국회에서도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여러 증거들이 쏟아지자 그제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지난 7월에는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2군 선수단에서 선배 선수가 후배 선수를 체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20년 실업팀 선수 인권침해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 제공=전용기 의원실

▲ 폭력의 대물림과 합숙 문화, 체육계 선후배 폭력 부추겨
체육계 선후배 간 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지나치게 수직적인 문화가 꼽힌다. 이로 인해 지도자와 선수는 물론, 선후배 선수들 간의 관계 역시 과도하게 위계적으로 형성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규율이 필요한 훈련과 경기에서는 수직적 관계가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수평적 관계가 이뤄져야 할 일상 생활에서도 수직적 관계가 강요된다는 것이 문제다. 같은 팀에 속해 있는 선후배이지만, 이들은 동료가 아닌 상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를 해소해야 할 지도자가 오히려 선후배 선수들 간의 관계를 더욱 수직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발생한다. 지도자의 권위를 일부 고참급 선수들에게 넘겨주면서, 선배 선수들이 후배 선수들에게 더욱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체육계 선후배 폭력 중 일부는 지도자의 묵인과 방관 아래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폭력의 대물림도 발생한다. 선배 선수로부터 피해를 당한 후배 선수가 자신의 후배 선수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오랜 기간 선배 선수의 폭력에 시달린 후배 선수는 폭력에 익숙해지게 되고, 자신도 죄의식 없이 후배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누군가의 피해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대한민국 체육계만의 합숙 문화도 선후배 간의 폭력을 조장하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대한민국 체육계에서는 합숙훈련이 강제된다. 학생 운동 선수들은 물론, 성인이 된 직장 운동선수들까지 합숙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훈련과 사생활의 분리를 어렵게 만들고, 훈련에서의 수직적 관계가 훈련이 끝난 뒤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로 직접 폭력 피해를 당한 운동 선수들은 훈련 장소(68.1%)와 합숙소(38.1%)에서 피해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군대의 내무반 생활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합숙훈련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 후배 선수는 부하 아닌 동료…합숙 만능주의도 타파해야
체육계 선후배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지나치게 수직적인 선후배 관계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실상 80년대 군대식 문화가 이어지는 운동부 문화를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선배 선수는 후배 선수를 부하가 아닌 동료로, 후배 선수는 선배 선수를 상관이 아닌 리더로 인식해야 할 때다.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중앙대 체육대학 교수)는 "(현재의 강압적 선후배 문화가 나타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운동부가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수직적, 위계적 문화가 더해지고 과거 군사주의 시대의 권위적 문화의 영향까지 가세해서 나타난 현상"이라면서 "특히 운동부 지도자, 관리자들의 책임이 크다. 선후배 폭행과 인권침해, 복종의 문화를 팀관리, 선수관리라는 미명으로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폭행, 폭언, 가혹행위, 인권침해의 선후배 문화는 스포츠계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면서 "사회 전반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 인권이 지속적으로 신장되는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폭력적 인권침해의 스포츠 선후배 분화는 이에 역행하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합숙훈련에 대한 재고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조건 합숙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 개개인에게 합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상시적으로 합숙훈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회 등 특수한 상황에서만 단기적으로 합숙훈련을 실시하도록 하는 방안과 합숙훈련 시 개인 시간과 공간 등 사생활을 보장하는 방안도 고민이 필요하다.

허정훈 공동대표는 "학생 선수들의 경우 상시적 합숙은 필요하지 않다. 특히 초중고 학생은 더욱 그러하다. 대학선수들은 일반 학생들과 같이 학교 내 생활관이나 기숙사를 사용하면서 공부하고 운동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또한 직장운동선수들의 경우 강제적 분위기에 의한 합숙이 많다. 출퇴근 이점, 경제적 도움 등의 이유로 합숙을 원하는 선수들도 많지만, 개인의 선택권, 사생활 보호와 자유의 확대 등의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 선수들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체육계 내부의 온정주의도 타파해야 한다. 그간 선후배 간 폭력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동료 사이인데' '선배가 후배를 혼낼 수도 있지'와 같은 안이한 인식으로 가벼운 처벌과 은폐가 이뤄져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체육계 자정능력의 상실로 이어졌다. 더 이상의 온정주의는 체육계의 둑을 무너뜨리는 구멍이 될 수 있다. 강력한 일벌백계가 이뤄져야 선후배 간 폭력에 대한 체육계의 안이한 인식을 뿌리 뽑을 수 있다.

[스포츠투데이 이상필 기자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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